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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준의 이런 야구]50년대 '영혼의 배터리' 김양중·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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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전 당시 완벽 호흡…왼손 에이스·명포수로 큰 족적

"너무 떨려서 혼났어요. 우리 남편이 세계 최강팀과 경기를 한다는데 내가 더 긴장되더라니까. 그렇지만 미국과의 경기에서 그 사람이 던진다니 너무도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어요. 지금도 그 느낌이 남아 있어요."

고(故) 김양중의 부인 정시년(84) 씨는 58년 전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1958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방한 경기 당시 한국의 2번째 투수로 등판, 당대 최강 타선을 상대로 기막힌 호투를 선보인 김양중은 그 시대 최고의 왼손 투수였다. 공이 빠르고 제구가 정교해 상대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그의 호투 뒤에는 또 다른 조연이 있었는데, 그와 함께 '영혼의 배터리'로 불린 김영조였다. 한국 야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전설'들, 이들의 야구인생을 되짚어본다.

◆광주의 라이징 스타

김양중은 1931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당시 호남지역 최고 명문 광주서중(광주일고 전신)에 진학해 에이스로 활약했다. 잘 생긴 얼굴에 야구도 잘했던 그는 1940년대 말 광주지역은 물론이고 서울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949년 6월 '제4회 청룡기쟁탈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는 그의 이름을 전국에 떨치게 된 중요한 대회였다. 전년도 우승팀 경남중을 비롯해 대구공업(경북), 부산중(경남), 전주공업(전북), 광주서중(전남), 춘천농대부중(강원), 대전사범(충남), 동산중(경기), 휘문중(서울) 등 9개교가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최강' 타이틀을 놓고 열전을 펼쳤다.

'디펜딩 챔피언' 경남중은 제1·2회 황금사자기 전국 지구대표 중등야구쟁패전 우승에 이어 1947·48년 청룡기대회를 연이어 석권한 최강팀이었다. 49년 청룡기의 관심사는 오직 경남중의 3회 연속 우승 여부에 쏠려 있었다. 무엇보다 경남중에는 1946년부터 3년 간 본선 5개 대회에서 16승 1패를 기록한 '학생야구 최고 투수' 장태영(전 상업은행, 국가대표 감독 역임)이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3연패를 노리는 경남중과 당시 '언더독'으로 평가받은 광주서중이 결승에 올라 13일 서울운동장에서 대결했다. 이미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던 슈퍼스타 장태영과 한창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 김양중, 두 좌완 에이스의 맞대결이었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김양중의 엄청난 역투에 자극받은 광주서중이 한국야구사에 빛날 연장 11회 명승부 끝에 2-1로 승리한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었기에 당시 승리는 '기적의 역전승', '전설의 명승부'로 지금도 회자된다. 장태영-김양중 두 라이벌의 탄생을 알린 당시 경기는 한국 야구를 세계무대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당시 경기는 오후 2시부터 열릴 예정이었으나 약 40분 늦게 시작됐다.

이유는 필리핀에서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스테이트먼 세계아마추어야구연맹 극동담당 총재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필리핀 주둔 미 해군 소장이던 스테이트먼은 한국야구의 수준을 확인하고 한국의 세계연맹 가입 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이날 경기를 찾았다. 그는 결승전이 끝난 뒤 "오늘처럼 기념할 만한 경기를 관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미국에 돌아가는 즉시 각계에 한국의 중등야구가 이처럼 향상·발전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겠다"면서 "또한 세계 아마추어야구연맹 극동책임자로서 한국의 연맹 가입을 추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명승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게 분명했다.

◆와세다의 대형 포수

김영조는 1923년(1922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3월 15일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에서 인삼재배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딸 셋을 두고 얻은 외아들이어서 김영조의 부모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김영조의 친척 가운데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이 있었는데, 김영조의 부모도 아들을 와세다로 보내고 싶은 소망이 강했다. 김영조가 7세가 되던 해, 부모는 고려인삼 밭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대 정문 근처에 한국음식점을 열면서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이 음식점은 고달픈 타향 생활을 하루하루 견디던 교포 및 유학생들에게는 휴식의 공간이었고, 자연스럽게 김영조도 와세다대 입학을 꿈꾸게 됐다.

이 시기는 아직 일본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와세다-게이오 라이벌전이 최고의 인기를 끌던 야구 이벤트였다. 자연스럽게 김영조 또한 야구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와세다대 야구부의 연습광경을 보고 자랐다. 여러모로 와세다는 그의 '꿈'이었고, 훗날 야구선수로 입학하며 소원을 이루었다. 이 시기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괴롭힘이 없지는 않았지만 김영조와는 다소 무관했다. 체격이 무척 컸던 김영조는 선수들 안에서 리더 역할까지 맡았다고 한다.

김영조가 포수를 맡게 된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그는 아침 조례 한 시간 전부터 학교 운동장을 혼자서 30바퀴씩 돌았다. 고학년이 되자 교장의 허가로 야구부가 창단됐지만 힘들다고 인식되던 포수 후보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때 가장 덩치가 컸던 김영조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수를 봤는데, 이것이 한국 최고의 포수가 탄생하게 된 계기였다. 이후 데이쿄(帝京)상업에 진학, 야구를 계속했다. 당시 야구부원은 16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마치(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역임, 1954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감독은 김영조를 각별히 아끼며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줬다.

김영조는 훗날 수기에서 "야구선수로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인격형성도 이끌어준 은사"라며 존경심을 나타냈다. 1945년 귀국 뒤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조·미 친선 대회에 조선 대표팀 포수로 출전했고, 1948년 농협의 전신인 '금융 조합 연합회'의 감독이자 주장 겸 선수로 전국 실업 추계연맹전에 출전, 명포수이자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1954년 제1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를 비롯해 55년 2회, 59년 3회 대회에서 부동의 4번 타자 겸 포수로 활약했다.

◆'영혼의 배터리'

1958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에 왔다. 상대팀은 '전서울군(서울 올스타)'이었다. 김양중과 김영조도 당연히 대표팀에 뽑혔다. 이 경기에서 전서울은 단 3안타를 쳤는데, 그 주인공은 성기영(2루수,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김희련(유격수, 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 그리고 김양중이었다. 김양중은 투·타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정시년 씨는 "경기 당일 남편보다 내가 더 긴장했다. 너무 떨려서 제대로 경기를 보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미국 팀과의 경기에 남편이 나섰다는 게 너무도 자랑스럽다"고 지금도 벅찬 목소리로 얘기한다. 김양중은 당시 선발투수로 나설 줄 알았는데, 막상 라인업카드의 선발투수는 그가 아닌 배용섭이었다. 1회초 배용섭이 무사 1·2루 위기에 빠지자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김양중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윤환(당시 육군 코치) 감독은 곧바로 김양중을 투입했고, 이후는 잘 알려진 얘기다. 공을 건네받은 김양중은 9회까지 3실점으로 선방하면서 한국의 마운드를 책임졌다. 비록 0-3으로 패했지만 당시 그의 호투는 한국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다. 김양중의 호투 뒤에는 그를 잘 다독이며 경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호흡을 맞춘 포수 김영조가 있었다. 정 씨가 전한 김영조의 소감은 이렇다. "양중이가 그렇게 던지는 건 처음 본다. 공이 너무 좋았다. 한 마디로 기막힌 투구였다." 최강팀을 상대로 '젖먹던 힘까지 쏟아냈다'는 의미다.

김영조는 훗날 외동딸을 정치인에게 시집 보냈는데, 사위가 문희상 더민주당 국회의원이다. 미스코리아 출신 연예인 이하늬의 외숙모가 바로 김영조의 딸이다. 한편 김양중의 미망인은 김양중의 유품 전체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기증했다. 그는 2018년 부산 기장군에 설립될 야구박물관에 남편의 영혼이 함께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희준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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