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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필]걸어온 길이 '역사' 김병지,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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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선수 넘어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김병지의 전격 은퇴

[이성필기자] '내 뒤에 공은 없다'는 신념으로 24년이나 프로선수 생활을 해왔던 '꽁지 머리' 김병지(46)가 19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을 통해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선수로서 오롯이 보낸 35년여를 이제는 추억으로 저장하고 격려와 갈채를 받으며 떠나고 싶다"라고 은퇴 결심을 전했다.

세월이라는 한계와 싸웠던 김병지는 '기록의 사나이'였다. 1992년 9월 2일 울산 현대 소속으로 아디다스컵 유공(현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른 이래 지난해 전남 드래곤즈 소속으로 9월 23일 수원 삼성전까지 총 706경기에 출전했다. 5개 구단(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 FC서울, 경남FC, 전남 드래곤즈)을 거쳤다.

프로축구 통산 최다 출장에 최고령 출전(45년 5개월 15일) 기록까지 보유했다. 골키퍼로는 최초로 지난 1998년 10월 24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1이던 후반 추가시간 헤딩골을 넣으며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던 것은 김병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장면이다.

또, 2000년 10월 7일 안양 LG전에서는 역시 골키퍼 최초인 페널티킥 골도 넣었다. 최다 무실점 경기도 229경기나 해냈고 2004년 4월 3일부터 2007년 10월 14일까지 포항과 서울을 거치면서 153경기나 무교체 출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프로축구 최초 500, 600, 700경기 출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도 오롯이 김병지의 몫이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상도 따라왔고 K리그 베스트11 4회(1996, 1998, 2005, 2007년)와 특별상 9회(1998, 2004, 2005, 2006, 2007, 2009, 2010, 2012, 2014년)를 받았다. 올스타전에서도 최초로 골키퍼로서 최우수선수(MVP, 2000년)상을 받았고 최다 연속 출장(1995~2007년), 역대 최다 출전(16회) 등 당분간 쉽게 깨지기 어려운 기록들을 만들었다.

김병지는 한국 축구사(史) 최초의 엔터테이너 기질을 갖춘 선수였다. 부산 소년의 집(현 알로이시오고교)을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창원 LG 산전에서 용접공 생활을 하다 테스트를 통해 상무에 합격해 선수 생활을 이어간 이력부터 화제였다. 1992년 당시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울산에 드래프트 번외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하며 '도전의 아이콘'이라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포항전에서 헤딩골을 넣은 뒤 승부차기에서 선방까지 해내며 팀을 챔피언결정전까지 이끌었던 1998년 포스트 시즌은 김병지라는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CNN을 통해 김병지의 골 장면은 해외 토픽으로도 소개됐다. 머리를 기르고 화려한 염색을 하는 등 골키퍼도 충분히 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후 두건을 하는 등 김병지를 따라 하는 많은 골키퍼가 등장했다.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A대표팀 제1의 골키퍼로 올라서는 듯했지만 2001년 1월 홍콩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 중앙선 부근까지 볼을 몰고 나가다가 상대에게 뺏기며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분노를 유발했던 것도 그의 축구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이다.

이후 김병지는 '인생의 라이벌' 이운재(43) 현 올림픽 대표팀 골키퍼 코치에 밀렸지만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동시에 한국 골키퍼 계보에 '순발력'의 김병지 Vs '안정형'의 이운재라는 흥미로운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2004년 포항 소속으로 수원과 치른 챔피언결정전은 더욱 놀라웠다. 1차전을 비긴 뒤 2차전도 승부차기까지 갔는데 포항의 마지막 키커로 김병지가 등장했다. 상대 골문에는 이운재가 버티고 있었다. 골키퍼가 심리적인 압박감이 심한 승부차기에 키커로 나선 것도 이채로웠지만, 마지막 키커였다는 점에서 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김병지의 슛이 이운재에게 막히면서 준우승에 머무르는 아픔을 맛보고 말았다.

마냥 튀기만 한 선수는 아니었다. 김병지는 그 누구보다 사회공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수입이 있으면 일부는 반드시 사회에 환원했다.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축구 철학과 사회공헌을 정신을 설파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최근에는 특정 정치인의 선거 운동을 돕고 자녀 문제로 홍역을 앓는 등 논란의 행보를 보여주며 속앓이도 했다.

김병지의 한 지인은 "축구를 통해 명성과 부를 쌓았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사회공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살았다. 물론 너른 인맥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일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룬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답하겠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라고 전했다.

선수 생활을 좀 더 이어가고 싶었던 김병지지만 거물급 노장 골키퍼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는 클래식, 챌린지(2부리그) 모두 마찬가지였다. 필드플레이어인 일본 축구의 전설 미우라 카즈요시(49, 요코하마FC)가 J리그 최고령 득점, 출전 기록을 계속 갈아치우며 아직도 현역으로서 스토리를 쌓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김병지의 은퇴는 아쉬운 부분이다.

김병지는 향후 골키퍼 축구 교실 등을 통해 후배 양성에 매진한다는 계획이다. 사실상 지도자의 길로 접어드는 셈이다. 그가 뿌린 씨앗이 한국 축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게 됐다.

조이뉴스24 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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