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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I의 과학향기]시도 때도 없는 '폭풍 졸음', 혹시 기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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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최 모(29)씨는 최근 불면증 때문에 수면 클리닉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지는 질환인 '기면증' 진단을 받은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수시로 밀려드는 졸음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많았지만, 늘 자신이 의지가 부족한 거라고만 생각해 왔다.

기면증은 생각보다 흔한 질환이다. 미국 역학 조사에 따르면 인구 2000명 중 1명이 기면증 환자다. 이를 우리나라에 단순 적용하면 현재 추산되는 환자만 2만5000명이다. 이에 비해 기면증 확진을 받은 환자는 2500명 정도에 불과해, 나머지 90%는 자신이 기면증인 줄도 모른 채 하루하루 졸음과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다.

기면증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잠에 빠지는 질환으로, 일반적으로 낮잠 검사를 했을 때 8분 이내에 잠들면 기면증일 확률이 높다. 얕은 잠을 거치지 않고 바로 꿈꾸는 잠, 즉 렘(REM) 수면에 빠지기 때문에 잠이 들 때쯤 꿈 꾸는 듯한 경험을 한다. 온 몸의 근육에 힘이 빠진 렘 수면 단계에서 갑자기 잠이 깨는 현상인 '가위눌림'도 자주 겪는다. 낮에 피로가 누적되지 않고 밤에 잠들게 하는 멜라토닌 호르몬이 정상인보다 늦게 분비되기 때문에 밤에는 오히려 불면증상이 나타난다.

◆뇌를 깨우는 신경전달물질 부족해 잠이 온다

기면증은 뇌에서 각성을 유도하는 하이포크레틴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해서 생긴다. 더 정확하게는 하이포크레틴을 만드는 뇌 시상하부의 신경세포체가 정상인보다 훨씬 부족하다. 흔히 '기면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증후군이 아니라 생물학적 원인이 분명한 '질환'이다.

1880년 프랑스의 젤리노 박사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졸음'에 'narcolepsy(기면증의 영어 이름)'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1950년대 미국의 디멘트라는 학자가 기면증 연구를 획기적으로 확대했다. 기면증 증상이 있는 개를 순종교배 시켜 선천적으로 기면증이 있는 개를 탄생시켰다. 그 개의 뇌를 조사했더니 하이포크레틴을 만드는 세포체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다.

현재 학계는 기면증을 면역세포가 자기 몸의 정상세포를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시기에 유럽에서 신종플루 백신을 맞은 청소년에서 기면증 발병률이 급증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백신에 이상이 있었다. 다시 말해, 면역계 이상으로 우리 몸속의 면역세포가 하이포크레틴 세포체를 파괴하는 바람에 기면증에 걸린다.

주로 15~16세의 청소년 시기에 처음 발병한다. 바이러스성 질환인 감기나 신종플루에 걸리면 몸 안에서 항체를 만든다. 사춘기에는 뇌 조직과 구조가 급격히 바뀌기 때문에 이런 항체가 엉뚱하게도 뇌의 특정 부위를 공격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자가면역질환이 이런 이유로 사춘기 때 처음 발병한다.

기면증은 유전되지만, 환경 요인이 더 중요하다. 선천적으로 하이포크레틴 세포체를 절반만 갖고 태어났더라도 졸린 증상이 없으면 기면증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사춘기 때 독감에 걸려 면역계에 이상이 생기면 세포체 수가 훨씬 줄어들면서 기면증에 걸릴 수 있다. B형 간염 환자의 가족은 모두 보균자지만, 모두가 간암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 몸의 면역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 기면증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다만 발병 초기에는 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하이포크레틴 세포체를 다 파괴하기 전에 면역치료를 할 수 있다. 스테로이드 같은 면역억제제를 썼을 때 기면증이 완치됐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도파민 분비하는 약으로 정상 생활 가능

문제는 발병 초기에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500명의 기면증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증상이 처음 나타난 시점에서 실제로 진단 받을 때까지의 기간이 평균 15년 걸렸다. 기면증 자체가 심한 통증을 유발하거나 다른 합병증을 유발하지 않고 졸음이 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면의학 전문가인 신홍범 대한수면의학회 보험이사는 "특히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 때문에 기면증 환자들이 병원에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나 방송에는 기면증 환자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잠을 자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렇게 긴장하거나 흥분할 때 근육에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은 가장 잘 알려진 기면증의 특징이지만, 탈력발작을 겪는 환자는 상위 1%에 드는 극심한 경우다.

진단을 늦게 받는 환자는 수년간 졸음 때문에 못 견디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우울증을 겪거나 활동량이 부족해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하이포크레틴은 식욕 조절 기능도 있는데, 이 호르몬이 부족한 기면증 환자들은 폭식을 하는 경향도 있다. 과체중이 될 위험이 정상인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기에 갑자기 심각하게 졸린 증상이 3개월 이상 지속되면 빨리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신 원장은 "우리 병원에 온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발병에서 진단까지 평균 7년이 걸렸다"며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진단 기간이 짧은 건 기면증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국내 인식도가 높아졌고 특히 교육열이 높아 졸음으로 성적이 떨어진 중고생들이 병원을 찾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발병한 지 수년이 지나 확진을 받을 때면 세포체가 모두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면역치료는 불가능하다. 현대 의학으로 기면증을 완치하는 방법은 줄기세포 외에 없지만, 그래도 약물을 이용하면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하다. 현재 기면증 치료제로 이용하는 '모다피닐'은 섭취했을 때 도파민, 세로토닌, 히스타민 같은 각성물질이 분비되도록 돕는 약물이다. 매일 약을 챙겨만 먹어도 졸리지 않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글 : 우아영 과학칼럼니스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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