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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NYT의 용기와 '느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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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판에서 특종 기사를 체크한 뒤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리곤 새벽 퇴근 길에 동료들과 해장국에 소줏잔을 기울이며 속을 달랜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하늘을 날아오를 듯하다. 최소한 하룻 동안은 여론 주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 기자들로부터 가끔 듣는 무용담이다. 그 시절 뉴스는 하루 단위로 움직였다. 특종을 하게 되면 하루 종일 화제를 독점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날 하루 동안은 경쟁사 기자들이 따라 잡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형 특종이라도 하게 되면 엉뚱한 기사가 올라온 경쟁 신문을 들여다보며 혼자 빙그레 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용담도 케케묵은 옛날 얘기일 따름이다. 이젠 휘발성 강한 특종 기사는 시효가 5분을 채 넘지 못한다. '실시간 저널리즘 시대'가 열린 때문이다.

◆NYT 편집국장 "속보 게재 멈추기 위해 달려갔다"

실시간 저널리즘은 분명 축복이다. 모바일 기기와 SNS로 무장한 많은 사람들의 정보 욕구를 바로 바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기술이 저널리즘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시간 저널리즘의 어두운 면도 만만치 않다. 도를 넘은 속보 경쟁 때문이다. 5분 앞서면 수 십만 클릭이 따라온다는 욕심에 설 익은 기사들을 마구 쏟아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기사를 송고하던 아날로그 시대의 '느림의 미학'은 이젠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뉴스 유통의 중심지인 포털에선 '복제본'이 '원본'을 밀어내는 상황까지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최근 언론의 무분별한 속보 경쟁이 구설수에 올랐다. 보스턴 폭탄 테러 당시 CNN과 폭스뉴스가 확인 덜 된 기사를 경쟁적으로 쏟아낸 때문이다. CNN과 폭스는 용의자 신원확인부터 체포 소식까지 발빠르게 전했다. 하지만 '믿을만한 소식통'을 인용한 그 기사는 전부 오보로 밝혀졌다. 보스턴 테러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 당국이 확인이 제대로 안 된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경찰은 사건 발생 이틀 뒤 용의자 사진을 전격 공개했다. 그런데 사진 공개를 결정한 경찰의 설명이 또 화제가 됐다. "섣부른 추측 보도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우려" 때문에 사진을 공개하게 됐다고 밝힌 때문이다. 덕분에 CNN과 폭스뉴스는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욕타임스와 NBC 같은 몇몇 매체는 진중한 행보를 보여 주목을 받았다. 특히 정확한 보도를 위해 속보 경쟁을 과감하게 포기했던 뉴욕타임스의 결단이 화제가 되고 있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질 에이브럼슨 뉴욕타임스 편집국장은 20일(미국 현지 시간) 미국 텍사스대학에서 열린 ‘온라인저널리즘 국제심포지엄’에서 "보스턴 마라톤 폭탄테러 발생 직후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으로 회사로 뛰어갔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속보 경쟁을 독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보 게재를 멈추기 위해서였다."

뉴욕타임스는 왜 속보 경쟁을 과감하게 포기했을까? 이에 대해 에이브럼스 국장은 "느릴 필요도 없지만 ‘1보’를 내보내서 얻을 것은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또 무분별한 속보 경쟁을 질타하듯 "우리는 ‘부정확성’의 루비콘강을 건넌 듯하다”고 비판했다.

보스턴 테러 보도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에이브럼스 국장의 비판은 한국 언론들이 매일 재현하고 있는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차별화된 뉴스 보다는 한 발 빠른 뉴스에 지나치게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과도한 속보경쟁,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물론 속보는 기자들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가치다. 순발력 없는 기자는 경쟁력을 갖기 쉽지 않다. 복잡한 정보를 알기 쉽게 정리해주는 것 역시 기자들이 꼭 가져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속보가 전부는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정확하고 차별화된 보도'다. 이건 꼭 저널리즘 원론 차원에서 하는 얘긴 아니다. 실리 측면에서 봐도 성급한 속보가 갖는 이점은 그다지 많지 않다. 큰 사건이 터지게 되면 독자들은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들 중에서 차별화된 내용을 담고 있는 기사에 먼저 눈이 가게 돼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이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해선 가끔은 '속보 강박증'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 에이브럼스 뉴욕타임스 국장 말 마따나 "(성급한) 1보를 내보내서 얻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확인 덜 된 속보보다는 사안을 정확하게 분석해주는 다소 느린 기사가 훨씬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게다가 요즘 속도 경쟁에서 승리한 기사의 시효는 기껏해야 5분을 채 넘지 못한다.

서두에서 아날로그 시대 기자들의 무용담을 소개한 건 어설픈 복고 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그 때 기자들이 요즘 기자들보다 팩트 확인에 더 철저했다는 얘길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기자들의 심리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정보 유통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기자들이 과도한 속보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얘길 하고 싶었다.

요즘은 각종 모바일 기기와 소셜 미디어로 무장한 시민들까지 실시간 저널리즘 대열에 가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들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선 정보에 정확한 맥락을 부여해주는 능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앞으론 그게 속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경쟁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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