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의 노예인 사람이 여기에 있다.
어느 대학생 인턴이 "왜 이렇게 뵙기 힘듭니까"라고 묻자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자네가 (사무실에) 들어와 몰래 수첩에 '누구 만남'이라고 적어 놓으면 돼. 난 수첩의 노예야."
그의 수첩은 빽빽하다. 아침 7시부터 밤 늦게까지 거의 일정이 들어차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것만 그날 아홉 개였으며, 아이뉴스24와 인터뷰는 그 중 여덟 번째였다.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그의 사무실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소셜 디자이너'라고 자처하며 스스로를 '수첩의 노예'로 만들어 사회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초로의 사내.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사진)를 만났다. 40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박 변호사는 대단한 입담을 과시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돈은 창의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가 상임대표로 있는 희망제작소는 수많은 사회 개혁 활동 와중에도 기업과의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게임회사 네오위즈(www.neowiz.com)와 함께 '만원의 마법'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화제가 됐다.
- 네오위즈와 '만원의 마법'을 진행하게 된 동기는.
"돈의 가치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1만원이 1천원도 안 되는 하찮은 가치로 변할 수도 있고 100만원, 1천만원의 가치가 될 수도 있다. 1만원이면 10달러인데 이 돈이면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가치가 달라진다. 1만원은 매우 큰 돈이다. 그 돈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사용할 것인지에 끌려 기획하게 됐다."
- 돈 잘 버는 기업이 부를 재분배 해주는 것이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 기업, 시민단체의 경계가 허물어 지고 있다. 기업은 돈을 좇으면 장기적으로 돈을 못 번다. '우리 기업이 사회를 위한 기관이다'라고 생각하면 돈 벌 수 있다. '돈 벌었으니 사회를 위해 쓰자'가 아니라 기업의 존재 목적이 사회공익에 맞춰져야 한다는것이다.
시민단체도 사실 기업이 하는 컨설팅 펌의 역할도 하고 언제나 수익 모델을 생각한다. 언젠가는 기금도 만들 생각이다. 우리도 굶어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웃음). 또 나를 비롯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돈 안 받는 공무원이다. 나 만큼 국가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이 어디 있나. 종 땡 치면 퇴근하는 게 공무원은 아니지 않은가.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서로가 비판, 견제도 하지만 얼마든지 좋은 일도 함께 할 수 있다. 기업이 의지가 있다면 같이 힘을 합해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돈을 가진 기업과 공권력을 가진 정부와, 시민사회단체가 협력한다면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를 만나면서 현 정국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었다. 시민사회계의 대표적 진보인사로 꼽히는 그는 항상 정권과 긴장관계를 늦추지 않는다.
- 촛불시위의 한 텀이 지났다. 적극 지지한 분으로서 어떻게 평가하는지.
"나를 비롯해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조금 당황했다. 여중고생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공의식을 갖고 활동하던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미래는 좋은 기업에 취직하려 하는 곳에 집중돼 있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은 부족했던 면이 강했다. (배석한 희망제작소 연구원을 가리키며) 저렇게 가끔 정신이 돈 사람이 오기는 하지만(폭소).

그래서 고민했는데 이번 촛불시위를 보면서 우리의 대를 이을 훌륭한 친구가 많다는 생각을 했다. 옛날처럼 학생운동으로 이념 같은 걸로 무장하지 않아도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적 지성을 발휘하는구나, 젊은이에 신뢰를 못 가졌구나 하는 반성도 했다."
- 이명박 정부 들어서 방송 장악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정권 입장에서는 그런 의지가 있을 수 있다. 참여정부도 언론에 욕 많이 먹지 않았는가. 나도 비판 많이 했다. 특히 노건평 씨 사건 때 엄청 얻어맞았다. 그런데 그래서 덜 부패할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면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는 일이다.
대통령도 예외 없이, 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이 필요하다. KBS 사장은 임기가 있고 보장이 원칙이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장하지만 억지라고 본다. 자기 사람이 검찰총장을 하고 언론사 사장을 하면서 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 법무부장관이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하고 여당 의원들은 포털 규제 법안을 제출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한 웹 민주주의의 수준을 어떻게 보는가. 민주적 의사 표출, 저질 의견 양산이라는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이 무슨 죄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음은 특별히 이런 상황을 조장한 건 아니지 않은가. 누구나 아고라에 의견을 쓸 수 있는데. 왜 그리 공격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물론 인터넷에는 분명 '구더기'가 있다. 욕설부터 좀 지나친 말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많다. 교각살우라는 말이 있듯, 뿔 잘못 뽑다가 소 죽일 수 있다.
긍정적인 점 많다. 아름다운재단의 모금 중 90% 이상이 인터넷에서 모금된다. 세계에서 가장 최고 투명한 재단이다. 미국의 '카운실 온 파운데이션(Council on Foundations)'이 이건 세계에서 유례 없는 사례라고 놀랄 정도이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것보다 잘못된 정보가 일부 유통되더라도 인터넷은 열려있는 창구여야 한다. 인터넷을 전면 규제한다면 이 좋은 것들을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이다."
◆ 고무신 신은 '디지털 노마드'
- 실제로 악플을 직접 당하시지 않나.
"말도 못한다. 내가 대통령 나올 거라느니, 아름다운재단 돈 먹으면서 다 어디다 쓰냐느니, 막 시비 걸고……. 속으로는 끓는다(웃음). 그래도 관심을 가져주는 것 아닌가. 품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강준만 교수가 나더러 '왜 경상도가 지배하는 정치세력 제대로 비판 안 하냐'고 한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 '말로만 하는 건 나도 잘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말로만 한다'고 생각했다. 운동가들의 애로사항은 따로 있다. 그래도 나는 강 교수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관용의식이 필요하다."
- 정말 대선에는 안 나가나.(웃음) 정계진출이라도.
"내가 지금 정치인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사회를 업그레이드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박 변호사의 명함에는 '소셜 디자이너'라고 써 있다) 정치에 별다른 게 있나. 사실 나는 이미 정치인이고 장관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디자인부'의.(웃음) 또다른 대통령이자, 또다른 국회의원이고, 또다른 공무원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제작소라는 사회운동 기업의 CEO이기도 하다. 그 구별은 무의미하다."
인터넷을 할 시간은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디지털 노마드"라며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두었던 자켓을 걸치며 양쪽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디지털카메라를 보여준 다음, 가방에서 노트북과 휴대용 무선인터넷 단말기를 꺼냈다.
"사무실에 앉아서 할 시간은 없지만 어디든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다 한다."
- 얼마 전 창비에서 낸 '우리시대의 희망찾기'를 새로운 실학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시대의 희망찾기'는 우리 사회의 과제를 열 세가지로 나눠 기술한 책이다. 희망제작소를 시작하면서부터 실학 이야기를 많이 했다. 외국에 갈 때면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 책을 가져가 몽땅 다 읽곤 했다.
그 책들에 보면 조선의 양반들이 말을 타고 종이 끄는 것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말을 왜 타나. 말은 빨리 가는 수단이다. 양반이 말을 타고 천천히 가면서 종더러 끌라고 하는 건 매우 비실용적이다. 또 대비가 죽으면 왕이 삼년상을 지낸다던지 당시에는 각종 허례허식이 많았다. 쓸 데 없는 명분이 지배하는 사회를 개혁하자는 것이 당시 실학자들의 관심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도 고담준론(高談埈論)이 판을 친다. 공무원은 책상에서 일하고, 기자는 기자실에서 취재한다. 국회의원들은 승용차를 탈 게 아니라, 버스나 택시를 타야 한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현장이 중요하다. 현장에 가면 문제도 알 수 있고 대안도 알 수 있다."

- 젊은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대학 강연가면 경남 거창고등학교 강당에 써 있다는 직업 십계명 이야기를 꼭 한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라' '부모, 형제, 배우자가 말리는 곳은 틀림 없는 곳이다' 이런 내용이다. 젊은 시절에 먹고 사는 거 걱정하며 비굴하게 대기업에서 쫀쫀한 월급쟁이가 돼 머슴살이 하는 것, 그게 좋을까? 실패하고 그러는 게 낫다. 젊어서부터 잘 먹고 잘 사는 걸 꿈꾸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 농촌 가 보라. 농촌 만한 블루오션이 없다. 지금 농업을 시작하면 누구보다 앞설 수 있다(웃음)."
◆ "젊었을 때 꼭 가봐야 할 곳은 감옥?"
- 젊었을 때 무슨 실패를 했는지.
"인생의 고비 하나하나가 인생을 설계해 준다. 멀쩡히 대학 다니다가 데모하다 잡혀 징역을 살았다. 세게 한 것도 아니고 주동자도 아니었다. 주동자는 다 도망가고 내가 잡혔다(웃음). 그날 저녁에 이화여대생하고 미팅 약속도 있었는데(웃음). 감옥에 가니 시골서 농사 짓고 계신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고.
그런데 지나고 보니 감옥 안 갔으면 어쨌나 싶더라. 감옥에서 인생을 배웠다. 만약 착실히 공부해 판검사나 됐으면 세상의 주변부로 갔을 거다. 감옥에서 수인들을 만나며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폭이 넓어졌다.
그래서 대학의 과정에 감옥 과정을 꼭 넣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좌중폭소). 4~5년은 방랑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삼성그룹 들어가고 사시, 행시 붙었다고 좋아하는 젊은이들 솔직히 좀 불쌍하다. 젊은 시절에 가 봐야 할 곳은 감옥이다(웃음).
(연구원을 가리키며)물론 저 분은 희망제작소에서 완전히 착취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저런 계산으로 따져 보면 회사 들어간 것보다 낫다. (연구원에게)그렇지?"
(연구원, 작은 목소리로)"네."(좌중 웃음)
- 유럽의 시민사회 운동가들은 연봉도 높고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만이 아닌 '할 만한 직업'으로 하고 있다.
"서양은 상식적인 시민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운동가들이 정상적인 직장의 월급 3분의 2정도 받으며 집도 사고 정년까지 채우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상에서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시민단체 가입을 해 간접 참여라도 해야 한다.
내가 하지 못하면 대신 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다고 시민들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단체를 지원하거나 만드는 등 사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많아져야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
- '희망'이란 무엇인가. 알 듯 모를 듯, 다소 추상적이다.
"희망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희망을 꿈꾸고 실천해 나갈 때, 희망이 생긴다. 단기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참 절망 투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이 많다.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선생은 서양에서 좋은 것을 보고 왔지만 실천해 볼 나라가 없었다. 우리는 실천할 나라가 있다. 권력도, 돈도 없지만 아이디어를 낸 것은 다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병묵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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