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양길모 기자] "AI 데이터센터도 중요하고 첨단 반도체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이다."
최근 국내 반도체 장비업계의 한 기업인이 강조한 말이다. 인공지능(AI) 산업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나온 이 한마디는 지금의 투자 열풍이 놓치기 쉬운 본질을 짚는다. 기업들은 더 뛰어난 반도체를 만들고, 더 많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확보하며, 더 큰 데이터센터를 짓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기본 조건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다.

AI가 산업의 판을 바꾸면서 반도체 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 매출 195조3000억원, 영업이익 107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도 매출 104조6155억원, 영업이익 83조3338억원으로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달성했다. 두 회사의 분기 영업이익을 합치면 190조원을 웃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서버용 반도체 수요를 끌어올린 결과다. 반도체 기업들이 호황을 누리는 사이 투자 경쟁은 데이터센터로 확산하고 있다.
삼성SDS는 최근 경북 구미에서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착수했다. 초기 전력 용량은 60메가와트(MW)로, 향후 최대 120MW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2028년 말 준공이 목표다. 반도체부터 클라우드, 데이터센터까지 AI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실적과 투자 발표 뒤에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바로 전력이다.
AI 데이터센터는 수많은 GPU를 동시에 가동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까지 식혀야 한다. 막대한 전력과 냉각설비가 필요한 이유다. 아무리 첨단 반도체를 확보하고 수조원을 들여 데이터센터를 지어도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지 못하면 정상적인 운영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데이터센터 건설 속도를 전력 인프라가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송전선로와 변전시설을 확충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입지 선정과 인허가, 주민 수용성 문제까지 얽히면 사업이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 기업이 투자금을 확보했다고 해서 필요한 전력까지 제때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온다. 그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기업은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데이터센터를 짓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투자 유치와 일자리 창출을 기대한다. 그러나 전력망 확충에 따른 부담까지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데이터센터 사업자가 부담할 비용과 국가가 책임져야 할 기반시설 투자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면 그 부담은 다른 산업계와 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다.
AI 산업 육성이라는 명분만으로 모든 비용을 사회가 떠안을 수는 없다. 반대로 국가 산업 경쟁력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을 개별 기업에만 맡길 수도 없다. 투자에 따른 이익과 비용을 합리적으로 배분할 원칙이 필요한 이유다.
전력 문제는 데이터센터만의 과제도 아니다. 반도체와 배터리, 철강, 석유화학 등 국내 주력 제조업 역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전력망 확충이 지연된다면 다른 산업의 투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래 산업을 키우겠다는 명분으로 기존 제조업의 경쟁력까지 흔들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도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증가에 따른 전기요금 부담과 지역사회 갈등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데이터센터 유치 실적을 내세우기에 앞서 지역의 전력 공급 여력과 비용 부담부터 따져야 한다.
물론 AI 투자는 미래 산업 경쟁력을 위한 중요한 과제다. 전력 수요 확대는 국내 전력기기와 발전설비, 원전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센터 투자와 전력 인프라 확충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와 기업은 투자금액과 GPU 확보 대수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전력 확보 계획과 송전망 증설 비용, 지역사회 수용성까지 함께 제시해야 한다. AI 산업의 경쟁력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많이 짓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록적인 실적은 AI가 가져온 거대한 기회를 보여준다. 하지만 반도체 호황이 곧 AI 산업 전체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술 경쟁력 못지않게 이를 뒷받침할 전력 인프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도체가 AI 산업의 두뇌라면 전력은 이를 움직이는 심장이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도 심장이 멈추면 소용없다.
이제 정부와 기업이 경쟁해야 할 것은 데이터센터 건설 속도만이 아니다. 이를 안정적으로 가동할 전력 인프라의 준비 속도다.
전력 없는 AI 강국은 없다.
/양길모 기자(dios102@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