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권서아 기자]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에 이어 이번에는 AMD 리사 수 회장 겸 CEO가 한국을 찾았습니다.
세계 AI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하는 두 회사 CEO의 한국 방문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지난 6일 저녁 입국한 수 CEO는 다음 날 하루를 빼곡하게 채웠습니다. 오전에는 국내 AI 반도체·소프트웨어 기업 13곳을 만났고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과 회동했습니다. 오후에는 게이밍 행사에 참석한 뒤 저녁에는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부회장)과 3시간 넘게 만찬을 가졌습니다.
지난 3월 이후 불과 7개월 만의 방한입니다.

황 CEO도 올해 6월 한국을 찾았습니다. 지난해 10월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이른바 '깐부치킨 회동'을 가졌습니다.
두 CEO가 이렇게 한국을 자주 찾는 이유는 뭘까요.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을 "제조업 백화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는 제조업 백화점이다. 마스크가 없으면 마스크를 만들고 미사일도 만든다"며 "미국 기업들에는 첨단 제조업을 갖춘 한국이 기회다. 이런 나라가 드문 만큼 협력을 늘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한국에는 AI 반도체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시장을 이끌고 있고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도 합니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와 로봇, LG전자는 가전과 제조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리벨리온과 퓨리오사AI, 딥엑스 등 저전력 AI 추론 반도체를 만드는 신생 NPU 기업들도 있습니다.
AI가 데이터센터 안에서만 쓰이던 시대에는 GPU와 메모리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AI가 자동차와 로봇, 공장 같은 현실 세계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피지컬 AI'입니다.

AMD의 최근 행보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AMD는 수 CEO의 방한 9일 전인 지난달 28일 'AI 대모'로 불리는 페이페이 리 스탠퍼드대 교수가 이끄는 미국 피지컬 AI 기업 '월드랩스'를 약 82억달러(약 11조원)에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월드랩스는 AI가 3차원 공간을 이해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입니다. 로봇 학습과 시뮬레이션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수 CEO는 삼성전자와 만찬을 마친 뒤 "삼성은 훌륭한 파트너다. 늘 좋은 전략적 논의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피지컬 AI 협력 여부에는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협력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협력 진전을 묻자 "전반적으로 매우 폭넓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We have a very broad partnership overall)"고 밝혔습니다.

반도체 업계의 관심은 삼성전자와 AMD의 협력이 어디까지 넓어질지에 쏠립니다.
지난 6일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반도체 산업 전망 행사에서 손인준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AMD의 게이밍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노트북·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가 2028년 상반기 삼성전자 2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에서 생산될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엔비디아가 기술과 핵심 인력을 확보해 사실상 우회 인수로 평가받는 그록(Groq)의 4세대 언어처리장치(LPU)도 같은 시기 생산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손 연구원은 AMD가 삼성전자와 가까운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향 고대역폭 메모리(HBM) 공급에 집중하고 있어 AMD가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기 쉽지 않았지만 삼성전자가 이를 공급했다는 설명입니다. 삼성전자는 AMD에 현재 세대 제품인 HBM4(6세대)를 공급하는 주요 업체로도 꼽힙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실적에도 반가운 전망입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의 초기 가동 비용 등으로 올해 3분기에도 적자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테슬라 차세대 AI 칩에 이어 AMD와 그록 물량까지 확보하면 공장 가동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유진투자증권은 삼성 파운드리의 흑자 전환 시점을 내년 4분기로 예상했습니다.

두 회사의 경쟁은 게이밍에서도 이어집니다.
수 CEO는 지난 7일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AMD 게이머 데이'를 찾아 한국 게이머들과 사진을 찍고 직접 사인했습니다. AMD의 라이젠 CPU와 라데온 GPU는 게이밍 PC에 탑재되는 대표 제품입니다.
황 CEO도 지난해 10월 30일 저녁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깐부치킨 회동'을 가진 직후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을 찾았습니다.
엔비디아는 한국 PC방과 e스포츠 문화를 조명한 영상도 공개했습니다. 올해 6월에는 황 CEO가 국내 PC방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엔비디아의 지포스와 AMD의 라데온은 게이밍 GPU 시장의 경쟁 제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회사가 한국에 단순히 물건을 팔러 오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연구거점도 만들려고 합니다.
AMD는 지난 7일 AI 우수 연구센터(CoE)를 국내에 설립하고 수백 명 규모의 연구인력을 채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엔비디아 역시 국내 AI 기술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내 NPU 업체들과의 접촉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리벨리온 박성현 대표는 지난 8월 황 CEO를 만났습니다. AMD도 이번 방한에서 국내 AI 반도체·소프트웨어 업체들과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GPU와 국산 NPU를 함께 사용하는 이종 컴퓨팅이 확대될 경우 경쟁 관계에 있는 국내 AI 반도체 기업들이 엔비디아와 AMD의 협력 상대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음 달에는 황 CEO의 장녀이자 엔비디아에서 옴니버스·로보틱스 제품 마케팅을 담당하는 매디슨 황 수석이사가 다시 한국을 찾을 예정입니다.
결국 엔비디아와 AMD가 한국에서 찾는 것은 반도체 하나만은 아닙니다.
AI를 학습시키고 돌릴 GPU와 메모리가 있고, 칩을 생산할 파운드리가 있습니다. 그 AI를 실제로 적용할 자동차와 로봇, 가전, 공장도 있습니다. 새로운 AI 반도체를 만드는 스타트업과 연구인력도 있습니다.
AI가 데이터센터 밖으로 나올수록 '제조업 백화점'인 한국의 진열대는 더 많아지는 셈입니다.
젠슨 황과 리사 수가 한국을 자꾸 찾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겁니다.
AI 반도체의 다음 전쟁터가 현실 세계라면, 한국은 그 기술을 직접 시험하고 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권서아 기자(seoahkwo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