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신뢰'라는 사회적 자산까지 앗아간 DLS 사태
2019.09.26 오전 6:00
[아이뉴스24 서상혁 기자] "은행에서 좋은 상품이 있다고 권유를 했어요. 독일 금리가 일정 정도만 유지 돼도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죠. 손실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고 물으니, 독일이 망하지 않는 이상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만 말했어요. 별 의심 없이 서명하라는 곳에 사인을 했죠. 은행을 믿고 평생 모은 노후자금을 넣었는데, 절반도 못 건졌어요. 내 나이 이제 일흔이에요. 어디 가서 설거지도 못할 나이인데, 어떡하면 좋아요 정말…."

19일 경기 성남시 우리은행 위례신도시 지점에서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상품 투자자들이 항의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20일 서울역 역사에서 열린 'DLS 피해자 대책위원회 회의' 도중 나온 이야기다. 마이크를 쥔 노인은 하염없이 자신의 사연을 토로했다.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너도나도 자신들의 억울함을 쏟아내겠다고 손을 들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DLS를 판매한 프라이빗뱅커(PB)들은 "원금이 보장된다" "예·적금처럼 안전한 상품이다" "독일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 볼 일 없다" 등 일부 사실을 왜곡하거나 또는 거짓으로 투자자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자들의 증언은 결국 하나의 큰 줄기로 합쳐진다. 은행을 믿고 돈을 맡겼다는 것. 그리고 이번 사태로 인해 은행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는 것.

'은행은 믿을 수 있는 곳'이라는 사회 통념이 언제부터 생기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은행에 저축하는 습관을 기르자'라는 내용이 담길 정도이니 말이다.

준 공공기관으로 평가받는 금융기관, 그 중에서도 특별하게 '은행업법'으로 통제를 받는 곳이라는 점, 높은 인가요건을 둬 아무나 은행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는 점들만으로도 '은행은 믿을 수 있는 곳'이라는 시민사회의 믿음은 결코 허황된 게 아니라는 방증이 된다.

반대로 이 같은 '콘크리트 신뢰'가 깨졌을 때, 우리 사회가 받는 피해는 막대하다.

은행은 시민들로부터 예금을 받고, 그 돈을 기업에 대출로 내어주는 그야말로 경제의 중추다. 그리고 신뢰는 시민들이 은행을 찾게 하는 원동력과 다름없다.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 예금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시장엔 돈이 흐르지 않을 것이고 종국엔 파탄으로 이어질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가뜩이나 현재 한국경제는 미·중 무역분쟁과 브렉시트, 사우디 원유시설 폭격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 더해 일본의 수출규제, 반도체 산업의 추세적인 부진 등이 겹치면서 총체적인 난국에 처해있다.

무엇보다 금융의 역할이 중요해진 이 때, 콘크리트 신뢰에 균열을 가한 이번 사태가 치명적이면서도 안타까운 이유다.

혹자는 사모펀드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후보자 시절 인사청문회에서 "창업 활성화를 위해선 자본시장으로 자금이 융통될 필요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합당한 말이다. 사모펀드는 죄가 없다. 다만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드나드는, 말 그대로 금융생활의 첫 번째 문턱인 은행에서 고위험 상품을 꼭 팔아야 하나'라는 비판은 곱씹을 만한 대목이다.

최근 손태승 우리은행 행장은 전국 영업본부장을 소집한 자리에서 "신뢰라는 것은 거울의 유리와 같아 한 번 금이 가면 회복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라며 "고객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진심으로 대해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손 회장의 말대로 신뢰는 빠른 시일내에 회복되기 어렵다. 그래서 하루 빨리 신뢰회복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당국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위험 상품 판매 중단 등 신뢰 회복 방안을 다각도로 마련해야 할 때다.

노력이 더딜수록 콘크리트 신뢰에 생긴 균열은 더욱 넓어져 나중에 가선 부서질 것이다.

/서상혁 기자 hyuk@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