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조국 전쟁에 파묻힌 '한일 경제전쟁'
2019.09.20 오전 6:00
[아이뉴스24 조석근 기자] 전 국민과 산업계를 긴장으로 몰아넣은 일본 수출규제 사태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드는 분위기다. 지난 7월 4일 EUV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필수소재 3종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전격적인 수출규제 실시된 이번 사태는 지난달 초 일본이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우대국(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원유 수입 지역인 중동을 제외하면 한국의 대외무역 최대 적자국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를 비롯한 전자, 자동차, 정밀화학, 공작기계 등 광범한 산업 분야의 핵심 소재, 부품, 장비에 대한 높은 대일 의존도 때문이다. 수출규제가 80일 가까이 이뤄진 상황이지만 정작 실질적인 피해는 예상보다 제한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선 문제가 된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 3종의 경우 일본 업체들이 해외법인을 통한 우회수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마저 차단할 것이라는 수출규제 사태 초반 엄포와는 달리 이같은 기업들의 움직임을 막지 못하는 분위기다. 아베 정권의 정치적 동기가 지배적이었던 만큼 자국 피해가 가시회될 경우 정권 차원에서도 부담이 확산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일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일본의 한국 백색국가 제외 방침에 대한 범정부대책 추진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는 세계적으로도 일본 기업들의 가장 큰 손님이다. 박대하기엔 너무 많은 물량을 구입하는 세계 최대 '큰손'들이다. 반도체 소재, 장비만 해도 한국 시장이 세계 전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손님이 가게 주인에게 불만이 쌓이면 다른 가게를 찾는 법이다. 고순도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는 연말을 전후로 일본산 대체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들이 지배적이다.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 데 따른 피해도 제한적인 상황이다. 일본의 대한국 수출업체 중 일본 정부가 전략물자 수출관리자율인증(CP)업체로 인증한 공개된 600여개 기업 상당수는 일본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출 대기업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한국 수출에 대한 포괄허가를 적용받는다. 소재 3종과 같은 개별허가 전환 방식의 직접적인 수출규제는 일본 정부도 큰 부담이 따르는 상황이다.

수출규제를 둘러싼 갈등 국면은 오히려 국내 각 업계로 옮아가는 분위기다.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위해 매년 1조원 이상을 투자하는 등 대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대상 기업은 대체로 중소기업들이다. 국내 산업위기 극복을 위해 국책 연구기관, 대학들과 해당 중소기업들의 산학연 협력을 가속화한다는 명분은 훌륭하다.

정부가 지출하는 전체 R&D 예산은 연간 20조원 규모다. 지금도 R&D 예산 비중만 놓고 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이 많은 돈의 상당 부분이 연구기관과 참가 기업들의 나눠먹기로 흩어진다는 게 매년 국정감사의 과학기술 분야 단골 소재다. 정부가 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를 더 급하게 추진할수록 더 많은 눈먼 돈이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기업에 대한 협력 요구를 둘러싼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갈등 양상도 나타난다. 국산화를 위해 대기업이 국산 소재, 부품, 장비 구입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이 분야 중소기업들의 줄기찬 요구지만 대기업이 쉽사리 들어줄 분위기는 아니다. 화학물질관리법, 주52시간 근무제 등 환경·노동 분야 규제완화, 특례조항을 둘러싸고도 재계와 시민사회의 신경전이 날카롭다.

수출규제 사태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베 정권이 소비세 인상을 앞두고 있고 미일 무역협상도 일방적 양보로 마무리되는 등 정치적 악재들이 있다곤 하지만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애초 수출규제 사태의 충격이 컸던 것도 한일 정치적 현안을 경제문제로 보복했다는, 예상 외의 수였기 때문이다.

한달여 사이 100만건 이상의 기사가 쏟아진 '조국 전쟁'이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다. 수출규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수출규제 사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소재, 장비, 부품 국산화와 규제완화 등 우리 차원에서도 점검할 것들이 많다. 그래야 한일 경제전쟁이 확산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안전할 수 있다.

/조석근 기자 mysu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