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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인조는 왜 '삼전도의 굴욕'을 피할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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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뉴스24 박용근 기자] '역사저널 그날'이 굴욕적인 항복을 둘러싼 병자호란의 뒷이야기를 다룬다.

24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병자호란 굴욕적인 항복, 피할 수 없었나?' 편이 전파를 탄다.

청나라 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파천한지 48일째 되던 날, 인조는 죄인의 신분으로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 황제 앞에 선다.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인조. 과연 굴욕적인 항복은 피할 수 없었나?

◆ 조선시대 조기교육, 병자호란에 영향을 미쳤다?

"오랑캐 원(몽골족)이 송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통일하여 백년에 이르니 오랑캐의 융성함이 이 같은 적이 없었다. 하늘이 더러운 덕을 혐오하여 대 명나라가 중천에 떠오르니 성스럽고 신령스런 후손들이 계승하여 천만년에 이를 지어다."

- <동몽선습> -

청나라 황제가 중원을 평정하며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나라와 군신관계를 유지하며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한다. 조선이 이렇게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했던 이유는 조기교육 때문이었다? 천자문을 뗀 아이들은 물론이고 왕세자 교육용으로도 쓰였다는 초급교재, <동몽선습>에 명나라의 영원성을 노래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던 것. 어렸을 때부터 명나라를 중시하는 교육을 받아온 조선 사람들은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지 40년 만에 다시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 화의 vs 의리, 성 안에서의 치열한 싸움

남한산성에 들어앉아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던 조선. 성 안에서는 다른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청나라와 ‘화의’할 것을 주장하는 최명길과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김상헌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것. 그러나 원손과 세자빈이 피신해 있는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성 안의 전세는 급격히 청나라와 화친을 맺자는 쪽으로 기우는데... 결국 전쟁을 끝내고자 스스로를 청나라의 신하로 낮춘 인조. 그에게 청나라 황제(홍타이지)가 요구한 것은 삼배구고두례였다.

◆ 홍타이지는 왜 굴욕적인 항복을 요구했나?

애초에 인조는 성 밖으로 나오기보다, 성 안에서 청나라황제가 있는 쪽으로 절을 하며 항복하는 방식을 원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끝까지 인조의 출성(出城)을 요구한다.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을 함락시킬만한 충분한 전력을 이끌고도 성을 함락시키지 않은 채 인조의 출성(出城)을 바란 이유는 무엇일까? 그 내막을 들여다본다.

사실 인조는 삼배구고두례보다 더한 항복의식을 할 뻔했다? 항복의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없애주겠다’고 한다. 삼배구고두례보다 더 굴욕적인 항복의식은 과연 무엇인가? 스튜디오에서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재연해본다.

[사진=KBS 제공]

조이뉴스24 박용근기자 pyk18@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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