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살인소설', 하찮음을 비웃는 경쾌한 방법
2018.04.25 오전 9:26
최고의 순간 위기를 만난 한 남자의 이야기
[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경석(오만석 분)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유력 국회의원 정길(김학철 분)의 딸 지은(조은지 분)과 결혼한 그는 차근차근 야망을 실현해왔다. 장인인 정길을 보좌하다 집권여당 시장 후보로 지명된 젊은 피. 언젠가의 기회에 걸림돌이 될까 군 복무도 피하지 않았다. 모든 걸음은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설계됐다.

아내 지은과는 무리 없이 쇼윈도부부의 관계를 이어왔다. 아내의 친구 지영(이은우 분)과 나눠 온 불륜 관계가 조금 아슬아슬해보이지만, 이들 부부를 둘러싼 세계의 우선순위에 사랑과 윤리의 가치 같은 것은 끼어들 틈이 없다.





경석은 장인의 지시로 비자금을 숨기러 지영과 함께 별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보장된 미래 앞에서 아직은 달콤한 연인과의 관계를 즐기며, 경석은 심부름을 핑계 삼아 지영과 별장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흥분과 평온함이 뒤섞인 최고의 순간, 경석을 찾아온 것은 꿈에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의 연쇄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딘지 찜찜하고 불쾌한 일들의 연속이다. 비좁은 시골길을 운전하다 저도 모르게 도로 위 개를 치어버렸고, 연인과 불장난을 위해 올라탄 보트는 속절없이 뭍에서 멀어진다.


별장의 관리인으로 보이는 청년 순태(지현우 분)의 등장은 당혹스런 상황에서 이들을 구해내는듯 보인다. 덮을 것과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는 아까 차로 친 그 개, '누렁이'를 찾는 남자. 그런 개를 본 적이 없다는 경석의 임기응변은 차후 펼쳐질 거짓들의 서곡일 뿐이다.



영화 '살인소설'(감독 김진묵, 제작 리드미컬그린)의 줄거리는 시골 별장을 찾은 경석이 속내를 알 수 없는 청년 순태를 만나고, 그가 쳐 놓은 덫에 자신도 모르게 걸려들며 시작된다. 지역의 실세 정길과 그를 배경 삼아 성공을 눈앞에 둔 경석은 부도덕을 망라한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해왔다. 검은 돈의 역학 아래 순조로운 척 포장돼 온 지역 개발 과정의 그늘은 영화가 자세히 말하지 않는 이들의 원죄 중 하나다.

그리고 순태는 정길과 경석이 감추려 드는 이 비밀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언제나 느긋한 미소를 띤 청년 순태가 그들의 치부를 노려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가 영화 속 갈등의 핵심이다. 권력의 지저분한 이면에 맞서는 순태의 방식은 때로 기발하고 때로 상대와 똑같이 지저분하다. 잡힐듯 잡히지 않는 순태의 의도를 뒤쫓다보면 어느새 관객은 실눈을 뜬 채 이 아리송한 심리전에 동참하게 된다.

'살인소설'이 취하는 서사 구조는 흥미롭다. 소설의 시작을 담은 문서창으로 시작해 차후 전개될 이야기가 극 중 누군가의 소설 중 일부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소품으로서의 소설 자체가 사건의 키(Key)가 될 수도 있다고 유혹하기도 한다. 극의 중후반부부터 결말까지, 소설이라는 키워드는 이야기를 보다 치밀하게 따라가려는 관객들에게 효과적 단서로 기능한다.

이야기의 배치는 과감하고 실험적이다. 액자식 구성 속에서 서사의 흐름은 매끄럽지만, 플래시백을 가장한 신들에 회상인지 상상인지 모를 장면들을 조금씩 뒤섞어 호기심을 유발한다. 의심 없이 진실로 받아들였던 장면들이 영화의 형식미에 복무하는 장치였음을 깨닫게 되거나, 속임수로만 읽혔던 단서가 실은 유효한 퍼즐 조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들은 오락적 의미의 패배감을 낳는다. 악력이 아쉬울진 몰라도 순발력은 충분한 멱살잡이다. 예상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각본의 술수가 추리의 재미와 블랙코미디의 쾌감을 더한다.



스릴러 장르를 표방했지만 웃음이 터지는 대목도 여러 곳이다. 경석을 궁지로 몰아넣는 순태의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중반부 시퀀스들은 특히 그렇다. 가진 지위와 권력의 크기에 비해 끝도 없이 하찮은 경석의 행동들은 B급 영화 속 코미디를 보는 감흥도 준다. 핑퐁처럼 쉴틈없이 오가는 순태와 경석, 정길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는 많은 사회에서 '불신의 아이콘'인 정치인들은 극 안의 경석을 통해 날선 일갈의 대상이 된다. 경쾌한 풍자다. 하찮고 또 하찮아 비웃음을 참을 수 없는 어느 권력의 민낯엔 기시감도 인다. 결말을 향한 반응은 엇갈릴듯도 보인다. 영화적 통쾌함을 뒤로 했다고 평할 수 있지만 되려 넘치지 않는 마무리에 고개를 끄덕일 관객도 있을 법하다.

로맨스 주인공의 얼굴을 지우고 의뭉스러운 청년 순태로 분한 지현우부터 위선의 말로를 보여주는 경석 역 오만석, 극의 도입부부터 인상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지영 역 이은우까지 배우들의 연기력에도 균질감이 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난 김학철의 연기는 강한 개성에서 오는 우려와 달리 극의 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지은 역 조은지의 비린 표정은 그간 여러 작품에서 종종 보아 온 것임에도 반갑게 다가온다. 이 영화에 컬트적 미학이 있다면 그 인상은 조은지의 얼굴을 통해 완성된다.

'살인소설'은 25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