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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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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샐러리맨에서 일약 재벌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오른 신세계아이앤씨 권재석 사장의 CEO론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다 확고한 스스로의 동기부여와 고개가 끄덕여질만큼의 강인한 승부근성,그리고 나름의 걸출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듯 합니다.

권 사장이 바통을 넘긴 91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 역시 이런 범주에 속하는 CEO입니다.주인공은 너무나 유명한 스타 CEO,비트컴퓨터 조현정 사장입니다.

“수많은 CEO중에서 조 사장만큼 어렵사리 자수성가한 창업자도 드물 것입니다.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오랜기간 사업을 이어오고 있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권 사장은 후배인 조현정 사장에 대해 덕담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비트컴퓨터 조현정(47) 사장이 어떤 점에서 대단한 자수성가형 창업자인지,원조 벤처 1세대로 꼽히는 그의 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참가자 면면을 봐선 제법 규모가 큰 행사인 듯하지만,뜻밖에도 이날 행사는 비트컴퓨터 주최로 열린 ‘비트프로젝트 100호발간 기념회’. 자사 IT교육센터 교재 100호출간을 기념한 자리였다.

일개 벤처회사 책자발간 100호 기념행사에 왜 주무부처 장관까지 참석을 했을까? 이는 비트컴퓨터가 자체 운영중인 IT인재양성 교육기관인 ‘비트교육센터’의 위력때문이다.

단순히 개별기업의 교육전문기관 행사가 아닌 것이다.비트교육센터는 국내 IT산업계 엔지니어들사이에선 ‘프로그래머 사관학교’로 불릴만큼 독보적인 존재다.

비트컴퓨터가 90년부터 운영중인 비트교육센터는 지금까지 7,000명가까운 프로그래머를 양산해온 것은 물론,총 45억원에 이르는 SW소스코드를 사회에 환원했다.

개별기업으로서는 참으로 실천하기 힘든 ‘인재양성’과 ‘부의 사회환원’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15년째 실천하고 있는 것.

“기술은 나눌수록 커집니다.비트컴퓨터는 나만 잘돼는 개념이 아닌,다같이 잘사는 나눔의 문화를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켜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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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컴퓨터 회사소개서

조 사장은 기업체의 사회환원에 대해 매우 남다른 책임감을 갖고있고,실제 사회환원을 실천하고 있는 몇안되는 CEO다.

강남 사무실에서 만났다.스타급 CEO로서의 높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조 사장은 매우 소탈하다.사업한지 20년이 넘었건만,여전히 진지하다.유독 반짝이는 눈매는 창업 2,3년차 같은 느낌을 준다.

조 사장은 매우 반듯하다는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다.어느것 하나 허튼 게 없고,생각과 행동 역시 항상 반듯하다.예를들면 이런식이다.

그는 원조 벤처 1세대 CEO지만 아직도 골프를 들떠보지도 않는다.이유는 직원들한테 열심히 일하라 해놓고,사장혼자 운동하는 것은 맞지않다는 나름의 고집스런 생각때문이다.

물론 휴일에만 하면 문제없지만,하다보면 평일에도 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고,그런 개연성 자체를 아예 없애겠다는 심산이다.조현정 사장의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다.

그는 베테랑 CEO답게 시장과 비즈니스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남다르다.완숙한 경영수완과 산업전체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는 단연 볻보인다.

비트컴퓨터는 83년 당시 대학 3년생이던 조 사장이 창업,설립 22년째를 맞고있는 1세대 벤처기업.초창기 의료정보화의 사업모델을 아직도 고집하며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창업후 내리 17년간 흑자행진을 이어왔을만큼 승승장구했고,2004년 역시 320억원대의 매출을 예상할만큼,탄탄한 대표적 모범기업이다.

◆ 지독한 가난,12살짜리 전파상 기술자

현정아,선생님이 등록금,생활비를 대줄테니 제발 학교공부를 그만두지 마라” 71년초,중학교 2년생인 15세의 조현정은 무작정 학업을 중단한채,충무로 전파상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재능을 아까워하던 선생님의 설득도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공부가 싫고 기술배우기를 좋아했던 조현정은 그 길로 전파상 가전제품수리공으로 변신,충무로에서 3년여간 일한다.어린 조현정이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전파수리공으로 나선 것은 갑짝스레 찾아든 집안의 몰락때문.

조현정은 김해시 한림면 부자집에서 태어났다.대지만해도 2천평이 넘는 큰 집에서 살았다.하지만 여섯살 때 부친이 작고하면서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고,조현정의 운명역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온가족은 서울 이문동에 부엌도 없는 월세 단칸 쪽방으로 옮겼다.생활전선에 뛰어든 조현정은 충무로에서 ‘업자수리 전문가’로 통했다.

즉 전파상에서 고치지 못하는 가전제품을 가져오면 고쳐주는 이른바 전파상을 대상으로 하는 종합수리센터였던 것.

“당시 전파상들이 가져오는 제품은 더 망가뜨려오기 일쑤였습니다.이리저리 손을 대다가 망가져 더 이상 손쓸수 없으면 가져오죠” 하루에 TV를 13대씩 수리할 정도의 수리숙련공이 돼있었다.

조 사장은 지금도 두 손 내밀기를 쑥쓰러워한다.두 손등에 굵직굵직하게 불거져있는 흉터자국때문이다.무거운 가전제품을 옮기다가,혹은 철제캐비넷의 칼날같은 모서리에 베여,고사리 같은 두 손은 성한 날이 없었기 때문.

3년가까이 지난 73년,조현정은 TV,오디오는 물론 냉장고,에어컨 등 국산은 물론 고장난 외국제 고가 가전제품을 가장 잘고치는 전문가로 충무로일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그 때 조현정은 불과 17세,학교를 다니면 고등학교 1년생 정도의 나이였다.

73년늦은 봄,조현정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이유는 화이트칼라가 되려면 졸업장은 있어야한다는 나름의 판단에서였다.무려 3년가까이 전파수리공으로 일에 묻혀있었지만,조현정은 총명한 소년이었다.

당시 조현정은 이미 영어 알파벳순서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은 상태였다.하지만 어린 조현정은 남달랐다.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때부터 발휘된다.

공부를 시작한후 맞이한 7,8월,이문동의 단칸방은 한껏 달궈진 슬라브지붕탓에 그야말로 한증막 그자체였다.선풍기는 꿈도 못꾸던 시절이었다.천정이 얼마나 더웠으면 그 한여름에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을까?

그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지 83일만에 당당히 검정고시에 합격했고,이듬해인 74년 용문고에 입학한다. 유년시절의 조현정은 이미 목표한 것은 반드시 이뤄내는 강인한 소년이었다.

◆ 청량리 맘모스호텔을 아시나요?

이미 중학교때 충무로에서 온갖 국산,외제 가전제품을 수리하며 이미 전자제품전문가 수준에 올라있던 조현정에게 이론공부가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다짜고짜 교수를 찾아간 조현정은 강의는 들을 필요가 없으니,연구를 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교수들은 반신반의하며 그의 실력을 테스트했다.

늘 시간이 틀리는 대형 시계탑과 고장난 방사능측정기를 고쳐보라고 주문한 것.70년대말 당시는 전기공급이 불안정해 아날로그시계는 당연히 시,분 초침의 움직임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었다.

다 뜯어본 조현정은 결국 시계속을 디지털방식으로 바꿨다.시계탑 시각은 그이후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방사능측정기 역시 3일만에 뚝딱 고쳐놓았다.

곱상하게 생긴 신입생의 현란한 솜씨에 인하대 교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야말로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는 반응이었다. 그 사건이후 인하대는 조현정을 꼭 필요한 특급 기술자쯤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대학 1년생 조현정은 그 때부터 개인집무실을 두고,한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450만원씩을 학교로부터 지급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교수들 역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막 전환할 때였습니다.즉 아날로그전문가 입장에서 디지털 전문가인 저와 함께 연구를 하면 시너지효과가 있을 걸로 교수님들이 생각하셨던 것같습니다”

학비면제에 스쿨버스를 타고다니고,연구실까지 둔 조현정은 무늬만 대학생이지 실제는 교직원내지 조교쯤되는 상황이었다.대학 2학년때부터는 교수들과 공동프로젝트를 수없이 진행한다.

조현정은 2학년때부터 수업은 거의 듣지 않는다.그의 대학동기생들이 조현정이란 학우를 잘 모르는 것도 이 때문.83년,군복무후 3학년에 복학한 조현정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학업도,프로젝트도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

결국 “이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조현정은 ‘창업’을 결심한다.그는 당시 청계천소재 PC기술지원 회사에 하드웨어 만드는 기술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터라,막연하게나마 컴퓨터관련쪽 사업을 할수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83년,8월,창업에 나섰다.남동생과 전화받는 여직원 딱 3명이 전부였다.사무실은 뜻밖에도 청량리역앞 맘모스호텔내에 마련했다.

“밤낮없이 개발해야하는데,24시간 출입이 가능하고 냉난방이 잘돼는 곳이 호텔말고는 없더라구요.실제 단순히 싼 임대료 사무실을 얻는것보다,일의 효율이나 전체 효용가치를 따지면 호텔이 훨씬 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아닐수 없다.월 60만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하지만,조현정의 수지타산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다.하루 17시간씩 일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업아이템을 찾아내는 그의 동물적인 사업감각이었다.정작 사업아이템을 PC용 SW로 정했지만,그는 SW에 대해,하드웨어를 구입하면 공짜로 끼워준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있는 점을 간파했다.

타겟고객층은 인텔리이고 돈이 있는 층이라야하는 결론을 내린다.나름의 논리근거를 집합,업종을 뒤진후 내린 결론은 ‘의사’였다.

“의료분야를 뒤져봤더니,의사들이 보험청구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더라구요.매달 의사와 부인,간호사 모두가 보름간을 매달려 수작업으로 보험청구건을 입력하고,합산을 하더라구요.틀리면 또하고 또하고 말입니다”

무릎을 쳤다.비트컴퓨터 최초의 사업아이템 보험청구프로그램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보험청구를 위해 매달 보름씩 매달리던 의사들로썬 한달에 2,3일정도 단말기에 데이터만 쳐넣으면 끝나는 보험청구프로그램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병원당 150만원에 판매했다.엄청난 고가였지만,날개돋치듯 팔려나갔다. 지방에서는 왜 안파냐고 난리였다.8월에 창업한후 연말까지 올린 판매고는 무려 5,000만원.대학생 CEO 조현정은 첫 작품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보험청구프로그램은 비트컴퓨터가 창립후 회사로서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효자’아이템이었다.

비트컴퓨터가 20년넘게 의료정보화 전문기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 역시 보험청구프로그램이 크게 작용했다.10대의 나이에 전자제품 엔지니어로 탄탄한 현장경험을 갖춘 조현정은 여느 대학생과 다른 청년이었다.

그는 이미 20대에 창업,흑자행진을 계속할만큼 경험과 나름의 비즈니스감각을 갖춘 될성부른 벤처기업가였다.

◆ 질풍노도,조현정의 성공신화

조현정 사장이 장관과의 면담때 제안한 게 바로,우수연구인력 양성을 위한 병역특례제도.산자부의 병역특례제도는 이렇게 탄생했다.비트컴퓨터는 덕분에 병역특례기업 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비트컴퓨터는 84년부터 성장의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종합병원 의료정보화사업을 본격화하고,IBM과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비트컴퓨터의 비즈니스감각은 날로 발전한다.

86년,IBM은 분야별 우수 SW개발회사를 대상으로 VAR(Value Added Remarketer)을 지정했다.선정된 4개사중 비트컴퓨터를 제외한 3곳은 쌍용 등 모두 대기업.고작 직원 16명에 불과한 비트컴퓨터가 선정된 것은 그만큼 기술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87년,국내 처음 내놓은 병원 원무관리프로그램 역시 불티나게 팔리며 2의 효자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88년 서울올림픽때 올림픽조직위에 납품한 성화봉송관리소프트웨어는 조 사장의 비즈니스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

“올림픽에 뭔가 기여를 하고싶습니다.성화봉송주자의 얼굴이 나오고,소리까지 나는 멀티미디어방식의 프로그램을 짤수 있습니다.기회를 주십시오”

올림픽조직위를 찾아간 조현정은 다짜고짜 성화봉송관리전산프로그램을 개발하겠다고 우겼다.결국 비트는 매킨토시로 짠 3,000만원짜리 프로그램을 개발,조직위에 무상 기증했다.

국내 최초 멀티미디어형 프로그램이었다.비트컴퓨터의 승승장구는 곧바로 매출성장세로 이어졌다.89년 14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92년에는 22.5억원, 95년에는 43억원,96년에는 무려 70억원으로 껑충뛰었다.

하지만 비트컴퓨터는 IMF한파가 몰아닥친 97년부터 더욱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간다.탄탄하게 기반을 다져놓은 탓일까? 비트컴퓨터는 IMF가 터지자,다른 회사와는 달리 매출이 가히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한다.

97년 107억원,98년 114억원,99년에는 163억원,2000년에는 무려 238억원규모로 늘어나면서 비트컴퓨터는 SW전문기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비트컴퓨터는 창업후 17년간 내리 흑자행진을 이어가는 엄청난 괴력을 과시하며 국내 대표 1세대 벤처기업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다.97년에는 600대 1이 넘는 엄청난 공모경쟁률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코스닥에 입성했다.

조현정,그는 누구인가
57년 경남 김해생. 검정고시와 용문고, 인하대 전자공학과 졸업. 대학 3학년 재학시절 대학생 벤처 1호인 비트컴퓨터를 창업한 1세대 벤처기업가.강한 추진력의 소유자.뛰어난 친화력과 리더십이 강점.늘 주위에 사람이 많은 벤처산업계 마당발.
취 미집에서 DVD로 영화보기
운동스스로 몸치란다.청계산을 오르는게 유일한 운동.
존경하는 CEO 선악 모두 선생이다.
친한 IT맨장흥순 터보테크사장,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사장 등 벤처기업협회 회원사 사장과 두루 친하다.
소주 한병(담배는 배우지 않았다)
10년후 모습40대의 얼굴을 책임지는 모습이 돼있기를 희망한다

◆ 조현정의 나눔론

“현역으로 보내주세요” 81년,고졸출신 조현정은 신체검사장에서 현역판정을 통사정한다.귀에 이상이 있었지만,숨기고 결국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하지만 정밀검사에서 귀에 이상이 발견된 조현정은 훈련소에서 퇴소조치를 당한후,끝내 보충역(방위병)으로 군생활을 하게된다.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현역으로 제대를 해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조현정의 이런 성격은 사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조 사장은 의외로 낙천적인 스타일이다. 사업하면서 고통스럽고,괴로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게 그의 지론. “실패를 안해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실패를 받아들일수 있어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했으면 성질나빠 벌써 죽었을 거라며 웃어제친다.그가 낙관론을 펴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재기할 방도가 없음을 20여년간의 비즈니스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와 기업의 이윤추구에 동물적 후각을 가진 조 사장이지만,기업영영의 절대적가치인 이윤추구와는 조금 비켜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매달리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기업의 사회환원.조 사장은 비트교육센터 얘기를 꺼내면 어린아이마냥 얘기보따리가 끝이 없다.90년 설립돼 벌써 15년째를 맞고있는 비트교육센터는 아직도 설립당시 이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시절 그가 이윤추구를 앞세웠다면 당시 전국에서 30명도 안쓰는 C언어대신 대중화된 코볼을 센터의 주요과정으로 택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C언어 대중화를 위해 코볼대신 C언어 교육에 나섰다.

물론 비트교육센터를 공짜로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교육비를 받는다.하지만 교육프로젝트를 통해 만든 SW소스코드를 모두 공개,IT산업계에 환원한다.

지금껏 교육생들이 프로젝트형태로 국내 최초로 개발,소스코드를 공개한 SW만도 926개.1건당 500만원정도로만 평가해도 무려 45억원어치를 사회에 환원한 셈이다.

비트교육센터가 IT산업계에서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수많은 IT교육센터를 제치고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최고수준의 교육프로그램때문이다.

과정을 마친 프로그래머들은 100% 취업은 물론 평생취업 100%다.즉 취업해 실직한 경우도 100% 재취업이 된다는 설명이다.교육센터에 대한 조 사장의 애정은 남다르다.IMF때 큰 돈을 들여 아예 교육센터전용 건물을 구입,지금껏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

“그나마 교육센터를 만들때의 이념을 잃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온게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사회환원이 정말 대단하지 않냐는 질문엔 초심대로 한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사재 2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수십명의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한번 선정된 학생들에겐 졸업때까지 책임지고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 조현정의 성공론

실력은 성공론의 기본이란다.그리곤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로 ‘초심’을 꼽는다. 조 사장은 주위 친한 CEO들로부터 ‘바른생활’이란 닉네임으로 통한다.늘 바른생활책대로 살려는 그의 스타일때문.

그는 사업은 초심을 잃지않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직원보다 더 부지런해야하고,늘 솔선수범하고 모범을 보여야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란다.

“실력은 있는데,초심잃고 기본을 무시한 CEO들이 대형 사고를 치고,엄청난 폐해를 줍니다.실력없는 사람은 사고를 못치죠.초심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는 벤처열풍에 묻혀 엄청나게 물의를 일으키고 폐해를 입힌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봐온탓에 초심과 기본에 대해서는 냉정한 잣대를 요구한다.세번째 방법론은 성공아이템을 찾아낼수 있어야한다는 것.

네번째는 ‘네트워크론’을 제시한다.“CEO들이 의외로 네트워크에 대해 관심이 적습니다.하지만 개개인의 밸류를 키우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필수입니다.서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가 벤처기업협회 등 각종 협회와 학회활동을 부지런히하는 것도 네트워크론의 중요성때문. “CEO는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이러면 둘다 안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더불어 잘된다는 생각을 하면 더 큰 것을 얻게되죠”

CEO 조현정의 경영스타일 역시 독특하다.비트컴퓨터 회사내에서는 “시키지않은 일을 왜했어?”라는 말은 아예없다.늘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한다.사장결제가 없어진지는 이미 오래된 일.

이미 90년부터 이익의 33%를 직원들에게 성과금으로 분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비트컴퓨터에는 개개인의 승진을 개개인 스스로 승진신청을 하는 독특한 인사방식을 오래전부터 고집한다.

내가 차장이나 부장,이사로 승진을 해야하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 스스로 승진신청서를 작성,제안을 하는 것.

창업 22년째를 맞는 비트컴퓨터 조현정 사장.이젠 지긋지긋하고,그래서 제법 꽤도 부리고 개인적인 부의 축적에도 관심을 가질법하지만,스타CEO 조현정사장은 지금껏 초심을 간직하고 있는 모범 벤처기업가였다.

여전히 진지하면서도 기업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갖고있는 그의 모범적 기업가정신은 벤처열풍,모럴헤저드의 후폭풍으로 고사위기를 맞고있는 국내 벤처산업계에 ‘주옥’같은 잔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조현정 사장은 회사내에서 종업원이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직원들은 종업원이 아닌 같은 동지이고,기업이 이익을 남기면 직원들이 같이 이를 나눠야한다는 기업문화를 갖고있다고 합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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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83년 8월
직원수160명(2004년 8월기준)
자본금65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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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영역의료정보사업, IT교육사업
매출목표2004년 340억원